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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de(온드)는 프랑스어로 파도, 물결, 파형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글, 음악, 춤 등으로 사람들에게 파도처럼 다가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틀에 갇힌 것 보다는 야생의 자유로움을 사랑합니다. 한국의 홈스쿨러이며 교육 혁명을 원하고 끄적끄적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며 가사 쓰기, 글 쓰기, 춤추기를 좋아합니다. 연기, 연극, 뮤지컬도 좋아합니다. 제가 쓰고 싶은 글들을 씁니다. Z세대로서 느끼는 글들이 많을 것 입니다. 온드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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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옛 조상들은 자신들이 만든 유교 문화가 많은 후손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걸 알까? 진짜 너무 화나고 울컥해서 쓰기도 힘들 정도다. 와, 물론 한국에서 자라면서 좋았던 점이 단 하나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 뭣 같은 유교 문화 때문에 힘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나로서는 진짜... 너무 뭣 같다. 이 문화가. 유교 문화는 어른들의 말은 '무조건' 맞고 공경해야 한다는 문화가 깔려 있는데, 그게 대체 얼마나 많은 학생들과 아이들과 청춘들의 꿈과 희망과 비전들을 막아버렸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뭐만 하면 '너 대드는 거야?' 라던지, '너 나랑 해보자는 거야? 시비 거는 거야?', '그래서, 내가 틀리고 네가 맞다는 거야?', '네가 뭔데 날 가르치려 들어? 어른 공경도 몰라?' 이딴 식의 말들을 내뱉는 게 너무 당연한 기성세대들, 그리고 그것을 듣는 게 너무 당연해진 요즘 세대들. 아, 그래서 꼰대라는 말도 생긴 것일 것이다. 자기 말만 맞고, 내가 보낸 세월이 틀리지 않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 신세대들의 개성을 짓누르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말들이 안 나오는 게 이상하다. 그래 놓고서 뭐? 창의적인 인재를 바라? 정말이지 양심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그들도 그들이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도,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가 한 평생 믿고 살아온 방식이 잘못됐다고 하면 누구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시대는 변화하고 세대는 교차된다. 이건 인류 역사에 있어 아주 당연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한다면 그럼 도태되는 수밖에 없다.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나는 자라오면서 저런 유교 사상이 깔린 가스 라이팅을 정말 많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아니, 나는 들어온 것이 확실하다. 물론 부모님들께 감사한 것들도 많고 배울 점도 있기는 하지만, 이 점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집에 있으면서 살이 찐 내게 살을 빼라고 이래라저래라 한다던지, 난 이게 정말 이해 안 간다. 이래 놓고 내가 그들에게 몸매에 대해 뭔가를 말하면 상당히 불편해하고 기분 나빠한다. 아니, 솔직히 남 얼굴, 몸매 품평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례한 건데,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무례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냥 말 건네듯이, 인사하듯이, '너 살쪘네, 빠졌네, 좀 탔네?' 어쨌네 저쨌네. 뭘 그렇게 남의 외형에 관심이 많을까? 알아서 어련히 하겠지. 자기가 살찌면 그건 자기가 가장 제일 먼저 잘 알고 있다. 이미 남들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사회에서 살찌는 게 얼마나 좋지 못한 것인지 배워와서 머릿속에 살 빼야지라는 생각이 가득할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말하면서, 그걸 정작 자신에게 하면 기분 나빠하는 그 사고방식이 이해가 잘 안 간다. 아니, 부모면 무조건 자식한테 그런 선 넘는 말들을 해도 자식을 위한 거라고 하면 다 괜찮아지는 건가? 정말 그 말을 듣고 자식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혹시나 이 말을 애용하는 부모님이 계시다면, 이 말이 얼마나 웃기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 정말 자식을 위한 건지, 아니면 자식을 통한 자기만족인지 말이다.

 

'쪼그만 게 꼬박꼬박 말대꾸하네.'

'너 지금 시비 거는 거야? 부모한테? 저 싹수없는 것 좀 봐.'

 

 내가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자주 들어왔던 말들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말은 했고, 이해가 가지 않으면 이해가 갈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 근데, 그렇게 말하고 나면 항상 돌아오는 말은 저런 말들이었고, 결국 '넌 틀렸고 난 맞아.'식의 이야기로 종결이 되곤 했다. 아니, 자식과 부모가 이야기를 하는데 맞고 틀리고 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애초에 접근방식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자식을 자신의 생각으로 찍어 누르려는 게 보이는데? 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하고 즐겼는데 항상 거기에 부모님은,

 

'춤은 너보다 잘 추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아무리 학교에서 상을 받고 춤 선생님께 인정을 받고 한 이야기들을 해줘도 그냥 '잘했네.'라고 건조하게 한마디 하고는 그냥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춤으로는 잘 되기 힘들거라 섣불리 말하기 일쑤셨고, 나는 그 말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생각해보자. 난 그때 중학생이었다. 중학생이 과연 가스 라이팅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힘들다. 그래서 나는 잠시 춤을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춤이 정말 좋았고 그것만큼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없다. 지금 스무 살이 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추고 있다. 그러니까 혹시나 지금 부모님의 반대나 가스 라이팅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지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부모님 말 무시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자기가 정말 좋으면 부모님 말 들을 필요 없다. 왜? 부모님은 그 감정을 모르고, 춤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잘 모르시거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살아갈 세대 자체가 다를 것이다. 부모님 세대엔 먹고사는 게 먼저였지만, 우리 세대는 자아를 찾아가는 시대라고들 한다.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이야기가 나오는 혁명의 시대와 적어도 30년 전의 이야기가 같을까?

 

자신의 이야기는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의 말에 흔들리며 살기에는 나는 충분히 자랐고, 성장했다. 서양에서는 스무 살(만 18세 이상)이면, 독립하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30살이 넘어서까지도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건 동양과 서양이 아마 부모 자식 간의 가치관이 다르고,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등 사상들의 차이에서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인터넷으로 인해서 Z세대들은 서로의 가치관들에 대해 많이 접하며 자랐다. 따라서 한 편의 가치관이 아닌, 여러 것들이 겹쳐진 새로운 가치관들이 그들 사이에서 형성됐다. 우리 Z세대들은 또 새로운 세대를 살아가야 한다. 부디, 우리 세대들이 살아갈 세대가 전 세대들이 똥 사지른 것들을 치우는 시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환경 문제들에도 관심이 많아졌는데, 앞으로 환경 개선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지구는 하나뿐이니까. 얘기가 잠깐 다른 곳으로 샜는데, 아무튼, 나는 현재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세대들이 모두 느끼는 감정이라 생각한다. 뭣 같지만, 우리 같이 이겨내 보자.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한국 학생들이 오히려 더 가스 라이팅에 당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진짜 교육 문제 얘기하면 고칠 게 한 두 개가 아닌데, 2018년, 내가 미국에 처음 갔던 해, 나는 정말 내가 보내온 시간들에 대해 매우 화가 났었다. 내가 왜 그런 쓸모없는 교육을 받아야만 했는지 억울했달까.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것은, 내가 한국 교육들에 대한 무쓸모함과 내가 가려는 방향과 맞지 않는 학교 시스템과 교육에 대해 얘기를 할 때면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게 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야.'

 

 하,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선생님. 정말이지, 말이 안 통했다. 참 웃긴 것은 초반에는 내가 그 말을 믿어봤다는 것이다. 그 말을 믿고 어떻게든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역시나 매일 똑같이 갇혀서 매일 똑같은 걸 반복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거나 할 시간은 낭비로 여기던 그 학교에서 내가 대체 뭘 찾겠나 싶다는 생각이 정말 매일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들었다. 내가 개성이 확실해질수록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내가 다른 애들과 같아지지 않으면 여기에 속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튀면 눈치를 주기 일쑤였으니까. 어느 날은, 내가 글로 상을 받아서 교장실에 불려 갔는데, 모두가 똑같이 교복을 입고 줄을 서서 받는 거다. 난 그게 뭔가 되게 이상해 보였다. 그래서 상을 받을 때도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그냥, 뭔가 공장의 제품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상장을 들고 반으로 뛰어와 가방으로 상장을 구겨 넣고 안에서 마구마구 구겨댔었다. 

 

'생각하지 말고 외우세요. 여긴 시험에 꼭 나와요.'

'여긴 시험에 안 나옵니다. 볼 필요 없어요. 자 다음 페이지.'

 

 학교에서 아마 지겹도록 가장 많이 들은 말일 것이다. 모든 것이 입시와 시험을 위해 돌아갔다. 나는 내가 거기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없는데 왜 가야 하는지 몰랐다. 그냥 가야 되니까 가야 되는 거라고? 그럼 이유가 '그냥'인 것 때문에 4천만 원과 4년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거라고? 앞뒤가 안 맞았다. 나는 우선 내 자아에 대해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 사람이고,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이다. 그게 없이는 의미가 없어보였다. 그리고 우연히 좋은 기회로 2주간 미국 LA에 다녀온 이후, 난 가치관에 엄청난 충격을 먹고 2학년 여름 방학,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더 일찍 할 걸. 


오늘 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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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매해 노벨 문학상 후보 목록에 오르는 작가인 동시에 인터뷰나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은둔을 자처하는 작가. 체코 출신으로 �

book.naver.com

1. 이 책은 니체의 영원 회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하는데, 나는 거기에서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든 것들이 영겁의 시간동안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내가 하는 행동들 하나하나가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 다만,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일회성이며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행동 하나하나가 그렇게 큰 무게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현재 내가 가벼움인지 무거움인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가벼움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종교도 없고 사후세계를 믿지도 않으며, 그것이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으면 끝나는 인생이라 생각하며,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행동 하나하나에 무거움을 더하면 난 편하게 살지 못할 것 같다. 그건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내가 작은 나쁜 짓을 하는 것조차 눈을 부릅 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을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인데 어떻게 좋은 행동만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상당히 경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은 가벼움이나 무거움 두개로 구별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사랑받는 이유는, 인생의 회귀와 존재 의미에 대해 한 번 쯤 철학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  소통과 인간 존재의 상관관계는 상당히 크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소통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인간은 소통을 갈구하며, 자신의 좋은 점들을 나누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의 좋은 점들을 흡수하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이 생긴 이후로, sns나 유튜브가 인기 있는 것도, 아니 그냥 tv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는 산물이라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 관점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 소통이 정말 소통인지, 아니면 그저 남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는 마음에, 인기를 얻고 싶은 마음에 만들어낸 또 다른 나와의 소통인지 말이다. 현대인들, 특히 gz세대는 sns에 매우 익숙하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이나 그런 곳은 대부분 현실과는 다른, 현실에서도 굉장히 하이라이트인 부분만 편집해서 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이 과연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는지는 의문이다. 인간은 소통이 필요한 동물이지만, 현재 sns에서 이뤄지고 있는 소통은 뭔가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채로 서로 텅 빈 눈동자를 바라보며 의미없는 말들이나 짓껄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일 뿐이라 생각한다. 

 

 

3. 고전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않은 터라, 이 작품을 대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이 작품 자체가 쉬운 작품은 아니라 그런지, 시점이 자꾸 바뀌어서 이해하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조금 아쉬운 점은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쉬웠던 점은 옛날 소설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상당히 여성 혐오적인 표현들이 많았고 성차별적인 요소가 많았다. 그래서 2020년을 살아가는 Z세대로서는 상당히 불편함을 많이 느꼈는데, 이건 시대적 배경상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신경 안쓰고 읽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심한 구절이 나오면 한 박자 쉬고 읽어야했다.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이라면 한 번 주의를 하고 읽는 것을 추천한다.) 

 

4.

키치

[ Kitsch음성듣기 ]

키치라는 용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개념처럼 매우 근대적인 것이다. 키치는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사이에 뮌헨의 화가와 화상의 속어로 사용되었으며, 하찮은 예술품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1910년대에 이르면 느슨하고 널리 유통되는 호칭으로서 국제적인 용어가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키치 [Kitsch] (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이 소설 속에서는 키치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 단어가 이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라고 한다. 나는 사실 이 단어를 원래 알고 있었다. 바로 뮤지컬 엘리자벳의 키치라는 넘버에서부터 알게 됐었는데, 그때는 사실 키치라는 뜻을 잘 모르고 노래를 들었던 것 같다. 키치는 하찮은 예술품을 가르킨다고 지식백과에 나와있는데, 사실 19세기의 대중 문화 예술이나 대중 그림들을 뜻했다고 한다. 그때는 뭐 대중적인 것이 천박한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키치,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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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나는 이 책을 예전부터 한 번쯤은 읽고 싶었다. 그래서 6월의 독서 책을 코스모스로 정했고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그런데 분량이 생각보다 많아서 이렇게 7월 중반이 돼서야 다 읽고 독서록을 쓰게 되었다. 물론 중간에 잘 못 읽은 텀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600~700 페이지에 이르는 아주 두꺼운 책이라 뭐 어쩔 수 없었다. 내 평생 읽은 책들 중 가장 두꺼운 책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아주 멀리, 또는 아주 깊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그리고 또 두꺼운 만큼, 굉장히 많은 것들을 얻어가는 것만은 확실하다. 저자가 얼마나 코스모스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 진심인지 그의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갈수록 더 처절히 느껴진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1934~1996년 동안 살았으며, 그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우크라이나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카고 대학교에서 인문학 학사, 물리학 석사, 천문학 및 천체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여러 유명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NASA에 자문 위원으로도 참여했다. 그는 내 생각보다 많은 책들을 낸 작가였다. 나는 그의 지적 욕구를, 배우려는 마음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 사실, 나는 이 분이 원래 살아계신 줄 알았다. 코스모스라는 책은 워낙 유명해서 알고 있었고 천문학 관련 서적이라 한 번쯤 읽어보고 싶다 였지 그렇게 크게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시작 문장을 읽자마자 나는 저자를 찾아보았고, 그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지구를 떠난 사람의 생각과 열정을 글을 통해 읽는다는 사실은 늘 신비하고 묘한 경험이다. 그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존재한다. 책 속에서는 그가 너무나 크게 내 마음에 우주에 대해 여러 말들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코스모스로, 우리의 고향인 별로 돌아간 칼 세이건이지만, 이 책 안에서는 살아 숨 쉬며 내게 많은 말들을 속삭여주었다. 특히나, 나는 책을 읽으며 감탄한 것 중 하나가 그의 문장력이다. 그는 어려울 것만 같은 천체 물리학과 천문학 박사이지만, 그의 문장력은 가히 소설 작가만큼이나 대단하다. 그의 문장을 읽으며 소름이 돋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의 문장을 읽으며 책을 내려놓고는 멍하니 있던 적도 있었고, 격하게 공감하면서 대화한 적도 있었다. 만약 누군가 보고 있었더라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문장력은 시인과도 같았고, 소설 작가와도 같았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 힘이 문장들 속에 있었다.

 

 이 책은 총 13개의 챕터로 진행이 된다.

 

1.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2. 우주 생명의 푸가

3.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4. 천국과 지옥

5.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

6. 여행자가 들려준 이야기

7. 밤하늘의 등뼈

8.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

9. 별들의 삶과 죽음

10. 영원의 벼랑 끝

11. 미래로 띄운 편지

12. 은하 대백과 사전

13.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줄까?

 


 이렇게 13개의 챕터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각 챕터마다 내용도 다를뿐더러, 시간 순으로 전개되지도 않는다. 나는 이 글에서는 챕터 하나하나의 느낌을 서술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책을 읽은 느낌과 간단한 줄거리를 설명하려고 한다. 챕터별로는 다른 게시물로 할 예정이다. 지금은 1회 차로 다 읽은 것이므로 그때의 느낌과, 다시 하나하나 챕터를 채워나가면서 적는 느낌은 또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사실 내용이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굉장히 방대하고 여러 내용들이 나오지만), 우리는 코스모스에 살고 있으며 이 코스모스 속 아주 작은 점인 지구에서 우리는 다른 것을 틀리다고 여기며 서로를 밀어낼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이름으로 우주에 대해 더 알아가고 탐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13 챕터에서는 핵전쟁에 대한 칼 세이건의 생각들을 다루는데, 거기서 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또 그 다른 것을 배척하려고 하는지 말이다. 사실 다를 것도 크게 없는 것이, 우리는 모두 다 인간이다. [인류]라는 거대한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우리는 서로를 밀어내고 배척한다. 여기서 나는 생산적인 비판 능력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유 없이 다르다고 비난하고 싫어하는 그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류의 발전에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진 못할 것이다. 인류라는 이름 아래, 뭉쳐서, 우주에 대해 더 알아가고 우리와는 다른 생물이 우주에 거주하는지, 어떤 행성들이 있는지 함께 알아가는 편이 훨씬 지구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다른 외계 생명체의 발견이 그저 외계인의 발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칼 세이건의 말이 난 굉장히 인상 깊었다. 외계의 발견은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커다란 기회라는 것에서 말이다. 인간은 그동안 우리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참 여러 곳에 의지해왔다. 종교부터 시작해서 철학과 인문학, 또는 많은 미신들까지 말이다. 하지만 정말 우주에 우리 인간 말고 다른 존재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인간만이 최고가 아님을 인정하고 우주적 가치관으로 인생을, 사람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이 오기를 굉장히 고대하고 있다.

 

 난 인간만이 최고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라 여겨진다. 물론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인간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간만이 고유하고 인간만이 대단한 생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많다. 뭐, 그건 그들의 가치관이라 건드릴 생각은 없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여기에서는 인간이 바다에 깊게 진출하기 전, 고래들의 이야기에 대해 다루는데, 난 거기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사실 고래들은 아주 먼 거리에서도 자신들만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은 200년 전에 거의 1만 킬로미터의 거리에서도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오늘날(1980년대 기준이니 더 짧아졌을 수도 있다.)에는 수백 킬로미터에서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역시나 인간의 증기선 개발과 여러 배들의 진출, 잠수함 등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거대한 소음들이 고래들 사이의 대화와 노래를 방해해온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소통 방법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과 소통 방식을 대체 인간이 뭐라고 방해하는지, 고래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특히나 특정 국가들에서 예전에 고래 사냥을 그렇게 했던 적이 있던 것을 기억한다. 뉴스에도 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참 못난 인간들이 무고한 동물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너무나 어이가 없고 안쓰럽다. 저들도 같은 지구를 살아가고 있는 생물체들이다. 물론 생태계적인 것은 무시할 수 없겠지만, 필요 이상의 사냥과 필요 이상의 환경 파괴가 과연 인간에게 좋게 돌아올 수 있을까? 전 지구적으로 고민되고 더 논의되어야 할 문제들이라 생각한다. 

 

 코스모스를 읽으며 생각보다 다양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의 의미에 갖는 의미들에 대하여, [인류]라는 키워드에 대하여, 우리의 고향인 코스모스에 대하여 말이다. 아직 다시 보고 기억하고 기록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긴 책을 다 읽었다는 것에 굉장히 뿌듯함을 느낀다! 집에 많이 있다보니 책도 많이 읽게 되고 생각보다 순기능들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아무쪼록 이 사태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다큐와 함께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치겠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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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은 되게 많이 들어본 영화인데 직접 보지 않았던 영화다. 1985년 영화라서 그럴까. 나는 막 요즘 영화 같은 마블이나 이런 영화도 좋지만 이런 클래식한 영화들도 굉장히 좋아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말하면 내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굉장한 마법을 가졌다. 내가 살지 않은 시대를 살게 해 주고,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을 가보게 해 줌으로써 나의 상상력의 공간을 넓혀준다. 사실 그건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청각적인 환상과 시각적인 환상을 통해 인간을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영화와 연극, 음악, 뮤지컬 등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기도 하고 날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한층 더 알아갈 수 있다는 게 너무 흥미롭다. 그중에서도 이 영화는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타임머신]이라는 주제 하나로 이렇게 신선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것도 1985년에! 어쩌면 나도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1985년에 개봉되었고, 나는 2020년에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이니까. 무려 36년 후의 사람이 영화를 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약간 타임캡슐 같은 느낌도 난다. 또 2020년에서 36년 후인 2056년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정말 궁금하다. 그때 나는 56살이고 내 친구들도 그 나이일 것이다. 나는 그때 어떻게 살고 있고, 세상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그때는, 내가 이 글을 쓴 것을 기억할까? 

 

 시간여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굉장히 큰 욕구를 불러일으켜 왔다. 시간 여행이라는 주제는 아마 아주 예전부터 사람들이 상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많이 하지 않나, '내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나, '미래에는 어떤 게 유행할 것 같아.' 같은 상상. 그게 어쨌든 시간을 건너뛴다는 개념에서 나온 생각이지 않나.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예전부터 얘기되었을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지금의 기술을 만나 이렇게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과거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재밌는 일이다. 그 당시 유행했던 패션, 음악, 문화들을 알 수 있으니까. 그 당시에 내가 만약 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내가 만약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브라운 박사를 알고 지내면서 시간 여행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래서 부모님의 젊은 시절로 갔다면 어땠을까. 뭔가 마음이 이상할 것 같다. 부모님의 젊은 모습이라니. 그들도 젊었을 때가, 아니 어렸을 때가 있었겠지. 나처럼. 그들도 꿈을 꾸고 그 꿈을 믿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갔겠지. 상상만으로도 굉장히 신기한 경험을 해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아주 미래에는 시간 여행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아주 미래에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100년 전만 해도 이렇게 우주에 대해 알지도, 달에 다녀올 수 있을지도, 화성 탐사를 시작할지도,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이 생길지도 몰랐을 테니까. 그게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인간은 우주에 대해 티끌만큼도 모르고, 또 심해에 대해서도 우주보다 모를 테니까.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 가능성을 가둔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거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질 테니까. 

 

 BACK TO THE FUTURE! 내가 만약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갈까? 지금 내 선택은 미래로 갈 것 같다. 미래에 지구가 어떤 모습일지, 인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다만, 타임머신의 공급이 대중화된다면 그것은 큰 도덕적 문제를 만들 것이다. 미래의 아이디어를 훔쳐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여러 윤리적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어쩌면 그 문제들 때문에 그 기술이 발명된다고 하더라도 쉽게 공개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인간에게 그 타임머신의 능력을 준다는 것은 꽤나 큰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미래 기술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의 해답을 요구한다.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은 또한 인간의 몫이다. 

 

 영화 중간에 주인공이 기타를 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내 기타와 색깔이 비슷해서 굉장히 좋았다. 뭔가 싱 스트리트 밴드가 생각나기도 했다. 밴드 음악이 유행하던 때에 살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문뜩 살아본 적도 없는 그때가 그립고 보고 싶어 진다. 비틀스와 퀸, 오아시스가 음악 판을 주름잡던 그 시절에 살던 그 기분들 말이다. 언젠가 타임머신을 타고 갈 수 있다면 그 시간대에 가보고도 싶다. 이렇게 재밌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어쩌면 타임머신의 장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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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에세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를 읽고 있는데, [방황하는 어른이 될 것]이라는 챕터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쉽게 방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헝가리, 일본, 한국을 [방황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전의 한국의 상황을 직접 체감해보지 못했다. 그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서 먼저 접하고 여러 책들과 뉴스들로 익혔을 뿐이다. 한국은 불과 70년 전에 전쟁터였고, 분단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1953년 휴전 이후  에세이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를 읽고 있는데, [방황하는 어른이 될 것]이라는 챕터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쉽게 방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헝가리, 일본, 한국을 [방황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 전의 한국의 상황을 직접 체감해보지 못했다. 그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서 먼저 접하고 여러 책들과 뉴스들로 익혔을 뿐이다. 한국은 불과 70년 전에 전쟁터였고, 분단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1953년 휴전 이후 남한은 경제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하였다. 산업적으로 성장기였을 때 태어난 우리 부모 세대들은 지금보다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많았으며, 취직도 보다 잘 되었다. 그렇기에 아마 그들이 우리를 보기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을 것이고 세대 간의 불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이 산 세대와 우리가 사는 세대는 확실히 다른 세대고, 다른 시대니까.

 

 우리나라가 급성장을 했기 때문일까, 한국하면 외국인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빨리빨리'가 크다. 외국인 패널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빨리빨리'문화가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냐는 질문이다. 그 문화는 과정을 무시하기 쉬우며, 그 안의 여유는 사치라고 여기게 만든다. 그냥 '빨리'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 바란다. (물론, 급성장 시대에는 이 문화가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게 미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3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지나든지 이미 몇 년이나 지났고, 그때의 아이들과 현대의 아이들은 굉장히 다른 교육을 받고 있으며 다른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런 문화가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10대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20대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30대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 나이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워왔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왔다. 뭐, 다들 알겠지만 예를 들어보자면, 학생 때는 학교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고, 대학 가면 취직하고, 취직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애 낳아 학교 보내고, 애 학교 보내면 취직시키고, 좋은 곳 취직시키면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마치 누가 정해놓은 규칙처럼 선명하다.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규칙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고 자란 환경부터 생김새까지, 흥미부터 재능까지 모두 다른 사람들인데, 왜 우리는 이런 규칙에 얽매여 있고 억압돼 있을까? 왜 우리 스스로를 이런 틀에 맞추지 못해 안달일까?

 

 그리고 그 틀에 맞추지 않은 사람들을 실패자로 보며 혀를 차게 되는 사회가 되었을까? 초집단주의 성향인 문화 때문일까? 아니면 급성장으로 자신의 삶이 맞다고 정의 내린 기성세대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 때문일까? 대체 무엇 때문일까? 우리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당장 나의 자매나 형제를 봐도 생김새부터가 다르고, 성격, 성향, 관심사까지 모두 다르다. 가족부터 친구까지 다른 구석들 투성이인데, 이런 70억 인구가 과연 같은 사람이 한쌍이라도 존재할까? 도플갱어가 실제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우리는 같아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며 사는 것일까?

 

 옆 나라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는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또 '오지랖'을 가졌다. 그건 아마 관심과 친절이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한 한국사회의 집단주의 문화 때문이리라. 누군가가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나와 다르면 틀렸다고 간주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이 정당하다는 듯 변명한다. 거슬린다는 둥, 왜 남들 가만히 있는데 너만 그러냐는 둥, 나대지 말고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둥으로 말이다. 교실 환경만 봐도 질문하는 아이가 있으면 다들 눈치주기 바쁘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이었지만, 깎이고 도려져 같은 모양이 돼버리고 만다. 개성없고 형태 없는 그냥 동그라미가 되고, 그 동그라미가 되면 축하를 받는 기이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현실이 분통하고 피곤한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해외를 마음 속에 품고 사는 인간이랄까.

 

 우리는 조금의 방황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찾아갈 방황이 필요하다.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볼 방황의 시간이 필요하다. 방황한다는 것은 찾는다는 것이 있다는 말이고, 찾아낼 것이라는 뜻이다. 방황한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뜻이고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방황한다는 것은 자신의 꿈의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방황한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금기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게 자란 어른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돼버리고 만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방황을 허락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방황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청춘들이 만들어낼 하모니는 정말이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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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가 단기전이 아닌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요즘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기업들과 소상인들까지 모두 코로나 이후의 시대인 '포스트 코로나'에 집중하고 있는 요즘, 그 시대를 잘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고마운 책을 하나 읽어보았다. 2020년 4월 말에 나온 책인데, 나는 이 책을 5월 초쯤 구매해 5월 한 달간 읽어보았다. 이 책에 밑줄을 그으며 읽을까, 아니면 그냥 볼까 고민하던 찰나, 밑줄을 쳐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 많이 나와 밑줄을 많이 치면서 읽게 되었다. 

 

 우선 나는 이 책을 김미경 강사의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작가 분이 하시는 이야기가 공감이 많이 가서 자연스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언컨택트의 작가 김용섭 소장은, 이제 더 이상 인맥이나 학연, 지연으로 연결되는 시대는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며 이 시대에 발맞춰 가야 한다고 말한다. 컨택트 시대에 살던 우리들은 이미 언컨택트 시대를 접했으며, 앞으로 언컨택트는 더 발전해나갈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 나는 비즈니스, 경제, 경영, 마케팅에 대해서도 관심이 좀 생겼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욕구에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며 민주주의다. 자본주의의 끝인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함께 발달해왔기에, 자본에 대한 공부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나도 이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어른으로서, 경제 활동을 하게 될 텐데, 내가 발 담글 경제에 대해 알고 발을 담그는 것과 모르고 담그는 것은 천지차이일 것이다. 자본과 비즈니스에 대한 공부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관련된 책을 읽으려고 하던 중, 이 언컨택트라는 책이 비즈니스와 관련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왠지 모를 성취감이 내 주윌 맴돌았다.


이 시대에서 참 반가운 것은, 내가 바라는 이야기들이 꽤나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Z세대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고(디지털 원주민), 언컨택트 시대의 교육에 대해서도 다룬다. 물론, 비즈니스 책이기에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많이 다룬다. 이 책의 목차는 전체적으로 3개로 나뉘는데,

 

1. 일상에서의 언컨택트

2. 비즈니스에서의 언컨택트

3.  공동체에서의 언컨택트

 

로 나뉜다. 챕터 1, 일상에서의 언컨택트에서는 인간의 본능인 성욕과 사랑, 소통 등에 대해서 다룬다. 과연 코로나가 우리의 삶에서 성욕을 억제시킬 수 있는가? 또는 미래 시대의 성욕은 어떻게 다뤄질 것인가에 대해 다루는데, 영화 HER을 예시로 로봇과의 사랑이 가능할 것인지, 결혼의 가치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에서도 그런 소재로 된 이야기가 하나 나온 적이 있다. 가상현실의 발전으로 인간은 정말 현실인 듯한 세계에서(하지만 가상 세계다.) 친구와 게임을 하고 실제로 대화도 나눈다. 물론, 게임 속에서는 게임 속 캐릭터로 변신한다. 정말 꿈만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온다. 어쩌면 미래 시대에는 힘든 현실을 잊게 해 줄 가상현실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며 말이다. 아무튼, 그 블랙 미러의 주인공들은 그냥 친구 사이인데, 게임 속에서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그 둘은 모두 남성이었으며, 한 명은 가정이 있는 상태였다. 실제로 관계를 한 것도 아니고 게임 속에서 한 것이지만 그 둘은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경험이 너무 강해서 잘 잊히지 않는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며 새로운 딜레마를 만들어낸다. 인간은 또 거기서 해답을 찾아낼 것이지만, 해답을 찾아내기 전에는 수많은 질문과 고민과 토의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나의 입장을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의 성욕은 아주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상현실에서 푸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친한 친구사이일 경우, 자신이 불편하다면 하지 않는 것이 맞고 말이다. 그냥 그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로봇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로봇과 가족이 되는 것도, 어쩌면 그저 영화 속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정말 로봇이 인간과 비슷해지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잘 설계가 된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인간 남자 친구, 여자 친구보다 로봇 연인을 원할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 불편해진 지금, 악수와 비주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과연 코로나가 인간의 오랜 습관인 악수와 비주를 못하게 할 수 있을까? 대답은 거의 YES다. 요즘 사람들은 악수를 하는 대신의 주먹을 맞대는 인사를 한다던지 팔꿈치로 인사를 한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거의 고개를 숙이는 인사나 손을 흔드는 인사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인사에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서양 문화권에서는 상당히 불편한 변화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비주를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습관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그 인사를 그만해야 한다는 것에 그들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사실 비주를 그대로 할 테지만, 코로나가 유럽에 전역으로 퍼진 지금도 그러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 챕터 1에서, 회식 문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이 작가님이 트렌드 분석가라 그러신 지 시대 변화에 확실히 민감하고 예민하신 것이 드러나서 굉장히 좋았다. 솔직히 Z세대로서, 이렇게 우릴 이해해주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다들 우리를 별종으로 바라보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이렇게 확실하게 우리가 가진 생각들을 말하는 책은 흔치 않다. 기성세대들의 생각과 신세대들의 생각이 확연히 차이 나는 것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아주 당연한 현상이다. 기성세대는 집단주의와 인맥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신세대들은 대부분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며 자라왔고 인맥보다는 능력으로 평가받기를 바란다. 


"개성과 취향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밀레니얼 세대가 직장에 들어오면서 기성세대의 식구 문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시작했다.... '꼰대'가 한국 사회의 중요 이슈로 부각하면서 '안티 꼰대' 문화가 급격히 퍼졌다... 1인 가구는 주류가 되었고, 혼밥. 혼술도 보편적 문화로 자리 잡았다."

-언컨택트 67page-

 

"한국 사회가 그동안 타인에 대한 의식을 많이 한 건 단일민족, 혈연과 나이, 서열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적 문화 때문이기도 한데, 기성세대에겐 당연했던 관성이 밀레니얼 세대나 Z세대로 갈수록 퇴색되어간다. 혈연, 학연, 지연 중심의 끈끈한 인맥이 퇴색되고, 역대 최저 혼인율, 역대 최저 출생률이 매년 경신되는 중이다. 평생 직장에 대한 환상도 완전히 사라지고, 긱 고용(비정규 근로 고용)이 보편화되며, 직장 동료와의 관계도 끈끈한 위계서열 구조에서 벗어난다. 관계에서의 느슨한 연대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시대다. 지금까지는 대면과 접촉이 중심이자 주류이고 비대면, 비접촉이 보조와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언컨택트 81page-


 또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연결보다는 편리한 단절을 꿈꾸는 시대가 되었다. 솔직히 나나, 내 친구들이나 요즘 친구들은 오지랖을 좋아하는 애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한국 특유의 남에 대한 간섭이 기성세대에게는 '정'으로 비쳤을지는 몰라도, 요즘 세대에게는 '오지랖'으로 비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택시 기사님이 끝없이 걸어오는 말들이 될 수도 있다. 솔직히 그분들을 이해는 한다. 그 분들 입장에서는 고객과의 대화가 일의 연장선일 수도, 또 힘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요즘 우리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굳이 모르는 사람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냥 조용히 가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이런 점들을 '언컨 택트'가 대신 해결해주기도 한다. 그냥 어플로 목적지를 적고 돈을 미리 지불하면 그냥 거기까지 가는데 가만히 앉아 가면 되니까. 언컨택트가 참 우리의 삶의 방식을 많이 바꿔놓는 것 같다. 

 

 이 챕터의 마지막에서는 코로나 사태가 왜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등을 이야기하며 끝난다. 저자는 이런 상황이 일어난 것이 모두 우리의 탓이라고 말한다. 인류의 탓이라고 말이다. 나는 저자의 그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 그동안 산업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참 많이도 자연을 파괴해왔다. 어쩌면 지금 코로나 사태는 자연 파괴로 인해서 우리가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독 2000년대에 들어서 전염병이 많이 퍼지고, 산불 같은 자연재해가 많이 일어난다. 이것이 과연 그저 우연일까? 그저 운이 안 좋은 것뿐일까? 아마존에 불이 나고, 호주에 큰 산불이 나고, 국내에서도 많았던 산불들이 과연 우연일까? 나는 미래를 준비하는 책들을 읽으면 읽을 수록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어쩌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선택이 아닌 아주 당연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지구에서 앞으로 먹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조금이라도 지구를 위한 생활들을 한다면 인류와 지구가 모두 화합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일단 나부터 실천해야겠다. 환경 문제에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잘 수행한다면 세상은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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